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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의 비유<7>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하느님 사랑의 구원 역사 담긴 포도밭 비유


2014.07.06발행 [1272호]



마태 21,33~46; 마르 12,1~12; 루카 20,9~19


공관 복음에서 공통으로 전하는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 후에 가르치신 내용이다. 이 비유에 대해 거의 모든 사람이 알레고리적(우화적) 해석이라고 동의한다. 알레고리적 해석은 비유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내용을 상징적인 것으로 보며, 그 상징을 통해 구체적 인물이나 역사적 사건에 대해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비유이기도 하다. 


주인의 뜻을 거부한 소작인


“어떤 사람이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비유의 시작은 평범한 포도밭의 모습을 보여준다. 새로 포도밭을 만들고 수확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는 것을 간략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을 하나의 상징으로 보면 비유는 역사적 사건들을 나타낼 수 있다.


우선 마르코 복음 12장 1절은 이사야서 5장의 내용을 생각하게 한다. 그중 몇 구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내어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네. 그 가운데에 탑을 세우고 포도 확도 만들었네. 그러고는 좋은 포도가 맺기를 바랐는데 들포도를 맺었다네. 자, 이제 예루살렘 주민들아 유다 사람들아 나와 내 포도밭 사이에 시비를 가려다오! 내 포도밭을 위하여 내가 무엇을 더 해야 했더란 말이냐? 내가 해 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란 말이냐? 나는 좋은 포도가 맺기를 바랐는데 어찌하여 들포도를 맺었느냐? (…) 만군의 주님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집안이요 유다사람들은 그분께서 좋아하시는 나무라네. 그분께서는 공정을 바라셨는데 피 흘림이 웬 말이냐? 정의를 바라셨는데 울부짖음이 웬 말이냐?”(이사 5,2-7)


이사야서의 노래는 하느님께서 이루신 일들과 그에 상반된 이스라엘 백성의 행태를 고발하면서 그들에게 불행이 닥칠 것이라는 내용이다.


이사야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이 비유를 읽으면, ‘어떤 사람’, 곧 포도밭을 만든 사람은 하느님을 나타낸다. 그리고 포도밭은 하느님께서 뽑으신 백성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이해할 수 있다. 포도밭을 보호하는 울타리는 유다인들에게 주신 율법을, 또한 탑은 성전을 의미할 수 있다. 하지만 ‘왜? 하느님은 그렇게 뽑으신 백성으로부터 멀리 떠나셨을까?’ 라는 질문이 생길 법도 하다. 교회의 전통적 해석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떠나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자유를 주셨다는 상징으로 이해한다. 비유의 중심에 서 있는 이들은 ‘소작인’이다. 그리고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끄는 정치, 종교적 지도자들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포도 철이 되자 그는 소작인들에게 종 하나를 보내어, 소작인들에게서 포도밭 소출의 얼마를 받아 오라고 하였다.” 이 구절에서도 역시 예레미야 예언자의 선포를 떠올릴 수 있다. “너희 조상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내 종들, 곧 예언자들을 날마다 끊임없이 그들에게 보냈다. 그런데도 그들은 나에게 순종하거나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목을 뻣뻣하게 세우고 자기네 조상들보다 더 고약하게 굴었다.”(예레 7,25~26) 주인으로부터 파견된 종은 예언자를 상징한다. 그 뒤의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주인의 뜻이 거부되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를 붙잡아 매질하고서는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주인이 또 다른 종을 보냈지만, 그들은 그 종의 머리를 쳐서 상처를 입히고 모욕하였다. 주인이 또 다른 종을 보냈더니 그 종을 죽여버렸다.” 


주인은 소작인들에게 세 명의 종을 차례로 보냈지만, 처음에는 빈손으로 돌려보내고, 다음에는 모욕하고, 마침내 마지막 종은 죽여버린다. 종들의 파견을 통해 지도자들의 횡포와 거부가 점점 더 심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언자들 역시 하느님의 소명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과 그 지도자들에게 말씀을 선포하였지만, 그들 또한 비유에 나오는 소작인들의 모습처럼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자신들의 악행 역시 쉽게 고치려 하지 않았다. 세 명의 종을 파견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마르코 복음의 비유에서 보이는 ‘3의 규칙’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뒤에 또 많은 종을 보냈지만 더러는 매질하고 더러는 죽여 버렸다.” 주인은 자신의 포도밭을 쉽게 포기하지 않고, 끈기와 인내를 가지고 소작인들에게 계속해서 종을 보내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에 파견된 많은 예언자를 표현하며, 그들의 파견에도 불구하고 성과가 없었음을 나타낸다.


비유에 드러나는 하느님 인내와 자애


“이제 주인에게는 오직 하나, 사랑하는 아들만 남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아들을 보냈다.” 여기서 사용된 ‘사랑하는 아들’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와 같은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이제 비유는 정점에 이른다. 주인은, 곧 하느님은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아들, 곧 예수님을 당신의 백성과 그 지도자들에게 보낸다. 하지만 그 결과 역시 예언자들의 경우와 비슷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그러면 상속 재산이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 (…) 그를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비유의 내용은 이제 예수님의 죽음을, 백성의 지도자들에 의한 십자가의 죽음을 표현한다. 여기에서 대조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주인과 소작인들의 모습이다.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라는 주인의 마음은 ‘저자를 죽여버리자’는 소작인들의 행동과 너무나도 다르다. 이것을 통해 비유는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역사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하느님의 계획이 거부되는 현실을 이야기한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은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돌아와 그 소작인들을 없애 버리고 포도밭을 다른 이들에게 줄 것이다.” 포도밭을 다른 이에게 준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새로운 백성을 선택할 것임을 나타낸다. 병행하는 마태오 복음의 표현은 더 구체적이다. “하느님께서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21,43) 이 구절은 이제 하느님의 구원이 유다인들에게서 이방인들에게, 더 나아가 믿음을 간직한 이들에게 옮겨가게 되었다는 근거를 제시한다. 


포도밭 소작인들의 비유는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백성과 그 지도자들의 죄를 상징적으로 꼬집는다. 또한 예언자들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그들의 회개를 기다렸지만 그것이 거부되었고, 마침내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통해 구원을 선포했지만 예수님의 삶은 수난과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 이러한 사건들을 계기로 하느님은 새로운 백성을 선택하게 됐다는 것이 비유에서 중심이 되는 내용이다.


비유는 소작인들, 곧 백성의 지도자들의 악행을 소재로 하지만, 비유에서 드러나는 것은 하느님의 인내와 자애로운 모습이다. 백성의 지도자들이 회개하기를, 그리고 백성이 악행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오기를 기다리지만 그들의 행동은 그렇지 못했다. 수 많은 예언자, 결국에는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까지 파견하는 자애로운 포도밭 주인의 모습은 그 모든 것을 거부하고 자신들 마음대로 행동하는 소작인들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표현된다. 


이런 의미에서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하느님의 구원 역사 전체를 요약한다. 이스라엘을 선택하고 축복하신, 그리고 예언자들을 통해 회개를 기다리고, 예수님의 말씀과 업적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하느님. 그렇기에 이 비유는 하느님과 그 백성과의 역사를 요약하면서 그 안에서 드러나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인내를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비유는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시편 118편 22-23절의 인용으로 마친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이 시편은 주님의 업적을 찬양하는 노래이고 시편 118편의 처음과 마지막에 표현된 찬양은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에서 찾을 수 있는 핵심적인 가르침과도 일맥상통한다. “주님을 찬송하여라. 좋으신 분이시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시편 118,1.29) 


출처 가톨릭평화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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