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이기(利器)에 사라진 정(情)
농촌 들녘의 개구리 울음소리가 요란스럽다. 내고향 함안 가는길에 인근 못자리 논에
가득 채워진 물속으로 동네 개구리들이 다 모여든 듯 싶다. 오월 들어 부쩍 모판에
푸릇한 생명의 에너지가 수북수북 차오르니 어느덧 모내기철이 돌아온 것 같다.
어린 시절 논에 모심기는 정말 힘들었다. "어! 어!" 하고 양쪽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모내기 줄을 잡은 이들은 모를 심기 도 전에 인정사정 없이 허리 펼 시간도 주지 않고
앞으로 밀어붙이기만 했다. 속으로 '이 힘든 농사일을 농기계가 해줬으면…' 하면서도
'다른 일들은 기계가 다 해도 흙탕물에 모를 심는 일은 못하겠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10여년이 지나고 나니 거짓말 처럼~ 유일하게 할아버지 아버지 한테 존댓말을
쓰지 않아도 되는 "어! 어!" 하며 모내기 줄잡이 하는 풍경은 찾아볼 수 없게 됐다.
부모님어렸을 적에는 얼마나 힘들어 했을까.하는 생각이 나를 철들게 한다.
50여마지기 모심는 날이면 어머니와 할머니는 성미 급한 아버지 수발하랴 음식 준비하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이날엔 동네 잔치라도 열 것처럼 먹거리를 푸짐하게 준비했다.
어머니는 그 바쁜 와중에 언제 준비를 다 했는지 점심이 담긴 큰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한쪽 손엔 막걸리 가득 담은 양은 주전자를 들고 어린 막내에게 한쪽 치맛자락 쥐여준 채
들길을 걸었다. 그 장수 같은 어머니 모습은 이제 어디서 뵈올 수 있을까.농촌이 일손이
부족해서 먼저 세상을 떠난 얼굴도 알수 없는 큰 누나를 포함해서 9남매를 낳았을까.
식사 시간이 되면 일꾼들은 아픈 허리를 펴고 꿀맛 같은 점심을 먹을 수 있다는 기쁨에
줄줄이 둑을 따라 걷는 종종걸음이 참 빨랐다. 새참 시간은 길 가는 나그네며 동네 어르신
들까지 오시라 해서 논둑 풀밭 위에서 함께 어울렸다. 막걸리 한 잔의 그 시절 인정과
자취는 지금 어디서 찾을까. 농부들이 고단함을 잊기 위해 부르던 농부가도 추억 속 장면
으로 사라졌다.
수십 명이 해도 힘들던 모내기 일을 혼자 해내는 농기계가 처음 나왔을 때 신기해하던
일이 생각난다. 최근엔 모내기가 필요 없이 볍씨로 논에 직파하는 영농 기술이 보급
됐다고 하니 농업도 IT만큼 발전하고 있는 듯하다. 20여년 전 고속도로 톨게이트의
통행료 징수원은 모두 남자였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여성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공무원 재직시 2000년대 초반 유럽에 선진지 견학을 갔었는데 톨게이트에 요금
징수원은 없고 하이패스가 가동되고 있어 신기했다. 그런데 얼마 뒤 우리나라도
요금소마다 하이패스 통행로가 생기기 시작하더니 금세 전국적으로 하이패스가 설치됐다.
어느 주말, 친척집을 다녀오기 위해 고속도로를 이용했다. 요금소 하이패스 옆 통행로에
처음 보는 무인 요금 정산기가 설치됐는데 그곳엔 사람도 의자도 없었다. 처음으로 돈을
넣고 정산 하려다 보니 시간이 여간 걸리는 게 아니었다. 한적한 톨게이트가 갑자기 더욱
외롭고 삭막해 보였다.
편리함으로 무장한 물질 문명의 이기(利器)가 인간의 정을 대체하는 현실이 고속도로
톨게이트도 예외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 출장을 마친 밤늦은 귀갓길의 피곤함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친절한 요금 징수원들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여간
섭섭한 게 아니었다. 이 직장을 통해 생계를 유지했을 아주머니들이 무인 정산기 때문에 밀려나
직장을 잃은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에 안타깝기도 했다.
뉴스로 보고 듣기에 정부는 국민 일자리와 고용 창출에 최선을 다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경제
규모가 확대된 것에 비해서는 일자리가 넉넉하지 않은 것 같다. 기업 입장에서야 생존을 위해
계속 자동화 시설에 투자해 생산 비용을 절감하려 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보통 사람에게는 반갑
지만은 않은 일이다.
인터넷이나 모바일 혁명도 일자리 지도를 많이 바꿔 놓았고, 앞으로는 더욱 그럴 것이다.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카메라나 전자사전, MP3 플레이어가 잘 팔리지 않아 이들 제품 생산과
관련된 일자리가 적지 않게 줄었을 것 같다. 사라진 일자리만큼 새로운 직업도 생겨난다지만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할 곳을 찾지 못한 많은 젊은이들에게 이런 산업 현장의 지형 변화는
또 얼마나 고된 현실일까. 그들에게 도전과 개척 정신을 강조하는 것도 한편으론 불편하다.
집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도로 보수 현장에선 작업복이 입혀진 한쪽 팔 없는 모형 안내 로봇이
길 한편에 서서 깃발을 들고 밤새 쉬지 않고 조심하라고 팔을 흔든다. 로봇은 배터리가 방전
되거나 전기 콘센트가 뽑힐 때까지 깃발을 흔들어대며 수신호를 보낼 것이다. 위험하고 열악한
환경 속에 우리를 대신해 일해주는 저 우스꽝스러운 인간 모형이 고맙기도 하다.
과학의 발달은 세상을 변화시킨다. 하지만 그런 기술 발전은 모든 이를 언제나 행복하게
하지는 못하고, 몇몇 사람을 슬프게 하거나 많은 이를 절망에 빠뜨릴 수도 있다. 예전엔
사람의 의자가 있었지만 지금은 무인 정산기 같은 자동화 기기가 자리 잡은 저곳을 바라보며
무엇이 우리에게 더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일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