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등불 밝히고 중에서 - 더 근원적인것...
세상의 모든 것이 낡아집니다. 그렇게 무성하던 나뭇잎들이 낙엽이 되어 떨어집니다. 그렇게 곱던 얼굴에 검버섯이 피어납니다. 인간의 문명도 나타났다가 사라집니다. 모든 것이 헛됨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뜨겁게 만들었던 종교 체험도 시간이 지나면 시들하게 변합니다. 한때 우리를 달뜨게 만들던 사랑의 감정도 어느 순간 가라앉게 마련입니다. 남는 것은 기억뿐입니다. 그 기억을 반추하며 미래를 기획하는 것이 인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새로움을 만들어갈 용기가 없는 이들은 과거의 기억에만 붙들려 살아갑니다. 전통은 아름답지만 전통주의에 빠지는 순간 고루해집니다.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생생한 기억에서 출발한 종교가 때로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도구로 변질되기도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가 그러했습니다. 성전체제를 통해 누릴 것을 다 누리며 살던 이들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아픔과 슬픔에 주목하셨던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자기들의 사고 체계에 들어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안다하던 이들이 진리의 구현이신 분을 죽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이라도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아드 폰테스' 근본 혹은 원천으로 돌아가자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꽤 괜찮은 신자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실한 신자들 가운데도 여전히 진정한 믿음에 당도하지 못한 이들이 많습니다. 핵심을 붙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핵심은 하느님의 마음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세상의 약자들을 향한 연민과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그 마음에 접속되는 순간 이웃에게 보였던 불친절한 태도와 무뚝뚝함, 무정한 마음을 부끄러워하게 됩니다. 그리고 독점이 아니라 나눔, 고립이 아니라 연대, 적대감이 아니라 환대의 세상의 꿈이 우리 속에 들어옵니다. 주님은 그런 세계를 함께 만들자며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담을 허물어 서로 소통하게 하고, 상대방 속에 있는 아름다움을 호명하는 일처럼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또 있을까요?
우리가 신앙생할을 하는 까닭은 남들과 구별되기 위해서도 아니고 구원에 대한 유대인의 선민사상처럼 배타적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의 힘을 의지하여 우리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욕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다른 이들과도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마음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강도 만난 이들의 좋은 이웃이 될 생각이 없다면 우리 믿음이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몸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세상의 중심에 놓으려는 구심력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우리를 타자들의 세계와 하느님의 마음을 향해 나아가도록 이끌어주는 원심력입니다. 구심력이 중력이라면 원심력은 은총입니다. 그 은총의 세계에 들어갈 때 비로소 우리를 사로잡는 두려움에서 해방됩니다. 문제는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그릇된 사목자들입니다. 믿는 이들의 분별력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너희 가운데 누구라도 성전 문을 닫아걸어서 너희가 내 제단에 헛되이 불을 피우지 못하게 하였으면 좋겠다.(말라키 1,10)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등잔대를 그 자리에서 치워 버리겠다.(요한묵시록 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