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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의 비유 <9>장터 아이들의 비유


갖은 핑계 대며 손 놓고 있는 이들을 향한 일깨움


2014.07.20발행 [1274호]



(마태 11,16-19; 루카 7,31-35)


‘장터 아이들의 비유’(마태 11,16-19)를 이해하려면 11장 전체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된다. 마태오 복음 11장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한 내용(11,2-6)으로 시작한다. 뒤이어 세례자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11,7-15)를 전해주며 그 후에 장터 아이들의 비유가 자리한다. 그리고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 곧 코라진과 벳사이다에 대한 경고와 심판을 전한다. 문맥을 보면 장터 아이들의 비유는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에 대해 다루고 있는 부분이며, 그 의미는 회개하지 않는 것에 대한 질타라고 생각할 수 있다.



복음 선포에도 변하지 않는 사람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여기에서 표현되는 ‘이 세대’는 마태오 복음 안에서 상징적으로 이스라엘을 의미하기도 한다(마태 23,36 참조). 하지만 이 비유 안에서는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이 살고 있던 시기에 살아가던 사람들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11,2)는 예수님의 언급을 참조한다면 이스라엘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이기보다는 실제적인 표현으로 보인다.



“(이 세대는)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비교되는 것은 이 세대의 사람들과 장터에 앉아있는 아이들이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이것이 아이들이 하던 놀이의 일종인지 밝히기는 어렵지만 그 내용을 통해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피리를 불고 춤을 춘다는 것은 혼인 잔치의 이미지이다. 혼인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유다인들에게 가장 큰 잔치였다. 혼인 잔치는 성경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비유이기도 하다(마태 22,1-13; 요한 2,1-2). 유다인들은 혼인을 축하하기 위해 일주일에서 길게는 열흘 정도 신랑, 신부와 함께 머물면서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신랑은 친구들과 함께 신부 집으로 가서 신부를 데리고 혼인 장소로 함께 갔다고 한다. 주로 저녁 시간에 혼인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마태오 복음에서 전하는 ‘열 처녀의 비유’(마태 25,1-13)도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장터 아이들의 비유에서도 역시 긴 기간 동안 음악을 연주하고 함께 먹고 마시고 춤추는 유다인들의 풍습을 배경으로 한다.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는 것은 장례의 이미지를 표현한다. 이와 비슷한 내용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는 이야기에서도 찾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에 이르시어 피리를 부는 이들과 소란을 피우는 군중을 보시고,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마태 9,23-24). 또한 요셉푸스의 「유다 전쟁사」 중 “수 많은 피리 부는 이들이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를 연주하며…”(3437)에서도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가슴을 치다’는 동사는 슬픔을 표출하는 행동을 나타내는데, 성경 안에서 이 행동은 죽은 이를 애도하는 것에 사용됐고(창세 23,2), 참회를 나타내는 것에도 사용됐다(마태 24,30). 이 노랫말 같은 표현에서 강조되는 것은 혼인과 장례, 곧 피리를 불며 춤춘다는 것과 곡을 하며 가슴을 친다는 것 사이의 대조이다. 많은 학자는 장례의 이미지는 줄곧 회개를 선포하던 세례자 요한에 대한 것으로, 그리고 혼인의 이미지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던 예수님에 대한 것으로 잘 이해한다.



회개와 구원, 실천 없이 요원해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하고 말한다.” 먹고 마시지 않았다는 것은 세례자 요한의 금욕적인 생활 모습을 나타낸다. 마태오 복음은 이미 세례자 요한에 대해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마태 3,4)라고 전한 바 있다. 이런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에 의해 거부됐다. 그리고 이 비유에서 금욕적인 생활이 그 이유라고 설명한다.



반면에 예수님에 대한 표현은 세례자 요한과는 대조적이다. “사람의 아들이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금욕적인 생활이 세례자 요한을 거부한 이유라면 사람의 아들, 곧 예수님을 거부한 이유는 누구와도 흥겹게 어울리는 지나친(?) 친교 때문이다. 여기서 사용하는 ‘사람의 아들’이란 호칭은 복음서에서 많이 표현된다. 예수님을 칭하는 표현에는 하느님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이 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이 예수님의 기원을, 곧 하느님과 같은 분으로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이라는 것을 강조한다면, 사람의 아들은 온전한 인간이 되어 우리 안에 오신, 그리고 수난과 죽음을 겪게 되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그렇기에 ‘사람의 아들이 먹고 마신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한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을 나타내는 표현일 수밖에 없다. 어떤 학자들은 이 표현을 통해 마태오 복음이 ‘사람의 아들’에 대한 사람들의 몰이해를 나타낸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예수님을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라고 말하는 것은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구약 성경에서 먹보와 술꾼은 벌을 받아야 할 사람으로, 또 피해야 할 사람으로 표현된다. “우리 아들은 고집이 셀 뿐더러 반항만 하며 우리 말을 듣지 않는 데다가 방탕아이고 술꾼입니다”(신명 21,20). “술을 폭음하는 자들과 고기를 폭식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마라”(잠언 23,20). 예수님의 행동, 먹고 마시는 것은 사람의 아들로서 당연하였지만 그것을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시제다. 마태오 복음은 옳다는 사실이 이미 “드러났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지혜 문학의 주제인 지혜를 예수님에게 적용한다. 구약 성경에서 지혜는 하느님의 뜻과 계명을 충실히 따르는 것에서 얻게 되는 선물로 묘사된다. ‘지혜가 이룬 일’이라는 표현에서 지혜서에 나오는 한 대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지혜는 혼자이면서도 모든 것을 새롭게 하며 대대로 거룩한 영혼들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로 만든다”(7,27)



마태오 복음은 하느님의 지혜가 예수님의 업적을 통해 “드러났다”고 말한다. 이 표현은 11장을 시작하는 대목과 연결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11,2). 예수님의 업적은 바로 유다인들이, 그리고 세례자 요한이 기다리던 ‘메시아’임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마태오 복음은 사람들이 여전히 사람의 아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거부하지만, 그가 메시아요 그리스도라는 것은 이미 그의 업적을 통해 증명됐음을 강조한다.



이 비유의 주제는 ‘거부’다. 혼인과 장례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장터에 앉아 있는 아이들을 통해 이 세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여준다. 사람들이 회개와 구원을 원한다고 말은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금욕적인 생활을 하기에 거부하고, 사람의 아들은 그와는 반대의 모습을 보이기에 받아들이지 않는다. 실상 이들은 회개와 구원에 관심도 없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며, 더 나아가 아무것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이들이다. 결국, 이 세대의 사람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코라진과 벳사이다가 회개하지 않는다고 질타하는 마태오 복음 11장 20-24절은 장터 아이들의 비유를 제대로 이해하도록 돕는다.



‘이 세대’의 사람들, 복음서의 말씀은 이제 더 이상 2000년 전의 시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시대를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이미 알고 있는, 그분의 업적을 모두 알고 있는 우리는 지금 어떠한 모습으로 사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혹시 여전히 당시의 사람들처럼 이러 저러한 핑계만을 찾으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된다. ‘내’가 진심으로 원하지 않는다면, ‘내’가 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업적을 보여준다 해도 그저 핑곗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회개와 구원을 원한다고 말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복음서에서 말하는 ‘이 세대’는 예수님께서 살던 당시가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이 세대’의 사람들일 것이다.



“지혜가 옳다는 것은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마태 11,19).



촐처 가톨릭평화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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