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한다는 것
《논어(論語)》의 〈이인(里仁)〉편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하루는 제자들이 모여 있었는데 공자께서 제자중의 하나인 증삼(曾參)이라는
제자에게 말하기를 “증삼아, 나의 도(道)는 하나로 일관되어 있단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증삼이 “네, 맞습니다. 스승님”하고 대답하였습니다.
함께 있던 제자들은 눈만 멀뚱거릴 뿐 도무지 무슨 말씀인지 알아듣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스승님이 나가시자 모두 증삼에게 가서 물어보았
습니다. “도대체 방금 스승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그러자
증삼이 대답하 였습니다.
“스승님의 도리는 충(忠)과 서(恕)일 따름이라네.”
송나라 때 주희(朱熹)는 논어의 이 대목을 풀이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
습니다. “충(忠)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다하는 것’이요(盡己), 서(恕)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미루어 남에게 행하는 것’이다”(推己及人).
그런데 참으로 재미있게도 성경에도 이 대목과 비슷한 구절이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22장 35~39절의 말씀입니다.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충(忠)입니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바로 서(恕)입니다. 공자가 말한
“일관된 도리”는 “충서(忠恕)”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장 큰 계명”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둘이 참 기묘하게 닮았습니다. 용서(容恕)는 바로 여기에서 말하는 서(恕)의
도리 즉, “이웃 사랑”의 도리를 나의 삶 안에 담아내는 것입니다.
단순히 나에게 잘못한 이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품어 안고 살맛나게 해주는 사랑의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만일 단순히 더는 기억하지 않는 차원이라면 같은 잘못을 일곱 번씩이나 눈감아
주는 것은 대단한 인내와 노력이 필요한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나에게 잘못한 이를 적극적으로 품어 안고 도리어 살맛나게 해주는 사랑의
차원이라면 일곱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이라고 하여도 여전히 다하지 못한 사랑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