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한 삶 앞에서' 중에서 - 고르반되었다...
너희는, 누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가 드릴 공양은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이 되었습니다.’ 하고 말하면, 아버지를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너희는 이렇게 너희의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마태오 15,5-6)
소위 '고르반' 제도에 대한 비판입니다. 고르반은 '하느님께 바쳐진 것'이라는 뜻입니다만, 바빌론 포로기 이후의 유대교에서는 그 단어가 일종의 '맹세어'처럼 변질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신앙의 진정성을 드러내기 위해 자기 소유물 가운데 어떤 것이 '고르반되었다'라고 선언하곤 했습니다. 자기 소유를 바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고르반 선언을 했다고 하여 곤 하느님께 바쳐야 했던 것은 아닙니다. 살아 있는 동안 사용권을 행사하되 사후에는 성전에 귀속되도록 하면 됐습니다. 고르반이라는 것이 굳이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떤 제도든 악용되기 쉽다는게 문제라면 문제겠습니다. 유대교에서 부모를 부양하는 것은 자식의 당연한 도리였습니다. 그러나 그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자식은 부모에게 드려야 할 것을 '고르반되었다'고 선언함으로써 부양의 의무에서 벗어나곤 했습니다. 경건을 가장한 자기 이익의 확대인 셈입니다. 성전 체제를 유지하려는 이들은 당장 수입으로 잡히지 않더라도 때가 되면 성전의 재산이 늘어난다고 보았기에 고르반 제도를 인정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질문은 어느 계명이 더 본질적이냐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느님의 근본 계명을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가르친 '고르반 제도'로 무력화하는 것이 과연 합당하나는 질문입니다.
삶이 선물이라는 것, '삶은 여전히 힘겨워도 우리 일상의 모든 순간이 하느님의 은총이 당도하는 시간이라는 감각'을 잃어버려 우리는 늘 빈곤감에 시달립니다. 칸트는 우리 마음을 감탄과 외경심으로 채우는 것이 둘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별이 빛나는 하늘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속에 있는 도덕률입니다. 별이 빛나는 하늘을 바라볼 때 인간은 자신이 유한한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 있는 도덕률은 우리가 하느님의 형상임을 깨닫게 해 줍니다. 나 좋을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를 복되게 하며 사는 것이 인생임을 일깨워 줍니다. 하느님 공경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뒤를 따르고 있습니까? 아니면 바리사이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길을 따르고 있습니까? 그들의 전통, 교회의 가르침은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과의 친밀한 사귐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잘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을 무시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빛 속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그 빛이 인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